가장 많이 지나치지만 기억나지 않는 길
도시에는 분명히 매일 지나는 길이 있다. 출근길,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익숙해서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먼저 아는 동선.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길의 풍경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가게가 몇 개 있었는지, 나무가 있었는지, 빛이 어떻게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가장 많이 지나쳤는데, 가장 남지 않은 길. 도시는 이런 길로 가득하다.

목적이 분명할수록 길은 사라진다
기억나지 않는 길의 공통점은 목적이 너무 분명하다는 것이다. 회사에 가기 위해, 집에 도착하기 위해, 약속 시간에 맞추기 위해 걷는 길은 ‘과정’이 아니라 ‘수단’이 된다. 이때 길은 풍경이 아니라 통로로 인식된다. 시선은 앞을 향하고, 머릿속은 이미 도착 이후를 생각한다.
이런 상태에서 몸은 길을 보지 않는다. 신호등, 횡단보도, 계단의 위치만 최소한으로 확인할 뿐이다. 주변의 간판, 창문, 사람들의 표정은 정보로 처리되지 않는다. 기억은 주의를 먹고 자라는데, 이 길 위에서는 주의가 철저히 목적지에만 쓰인다.
그래서 가장 자주 지나는 길일수록, 오히려 낯설다. 어느 날 공사를 해서 길이 조금만 바뀌어도 당황하게 된다. 분명 매일 지나던 곳인데, 새로 생긴 가게 하나가 큰 이질감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그 길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니라, 그냥 통과하고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동선은 감각을 잠재운다
도시는 반복을 요구한다. 같은 시간에 같은 길로 이동하고, 같은 리듬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끝낸다. 이 반복은 효율적이지만, 감각을 점점 무디게 만든다. 처음에는 눈에 들어오던 것들이 점점 사라진다. 가게의 표정, 길의 굴곡, 계절의 변화까지도.
이때 길은 기억의 대상이 아니라 자동화된 경로가 된다. 몸은 생각 없이 움직이고, 생각은 다른 곳으로 떠나 있다. 음악을 듣거나, 메시지를 확인하거나, 머릿속으로 대화를 반복한다. 길은 그저 이 모든 생각을 실어 나르는 배경이 된다.
그래서 기억나지 않는 길은 대부분 지나치는 동안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찬 길이다. 외부 풍경 대신 내부 독백이 흐르고 있었던 공간. 길은 있었지만, 우리는 그곳에 없었다. 이 상태가 반복되면, 도시는 점점 추상적인 공간으로 느껴진다. 분명 살고 있는데, 살았다는 흔적은 남지 않는다.
기억되지 않는 길이 말해주는 것
기억나지 않는 길은 무의미한 길이 아니다. 오히려 그 길은 우리가 어떤 삶의 상태로 살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너무 바빴거나, 너무 익숙했거나, 너무 멀리 가 있었던 시기의 흔적이다. 그 길이 비어 있는 만큼, 그 위의 우리는 늘 다른 곳에 있었다.
가끔은 일부러 그 길을 다시 걸어볼 필요가 있다. 목적 없이, 속도를 늦추고, 시선을 옆으로 돌린 채로. 그러면 처음으로 보이는 것들이 생긴다. 늘 지나쳤던 가게의 불빛, 오래된 건물의 벽, 생각보다 조용한 골목의 소리. 그 순간, 길은 처음으로 ‘장소’가 된다.
도시는 우리에게 많은 길을 준다. 하지만 모든 길이 기억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기억되지 않는 길이 너무 많아질 때, 우리는 삶을 지나치고 있다는 신호를 놓치게 된다. 가장 많이 지났지만 기억나지 않는 길은, 어쩌면 가장 많이 비워두었던 시간일지도 모른다.
도시의 길은 늘 그 자리에 있다. 우리가 기억하든, 잊든 상관없이. 하지만 그 길을 어떻게 지나왔는지는 결국 우리의 몫으로 남는다. 목적만 남기고 통과할 수도 있고, 잠시라도 머물며 흔적을 남길 수도 있다.
다음에 그 익숙한 길을 걸을 때, 아주 잠깐만 속도를 늦춰보자. 기억나지 않던 길이 처음으로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비로소 그 길을 ‘지나간’ 것이 아니라, 한 번 살았다는 느낌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