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마다 걷는 속도가 다른 이유
같은 사람이라도 도시에 따라 걷는 속도가 달라진다. 서울에서는 자연스럽게 보폭이 빨라지고, 작은 도시나 여행지에서는 이유 없이 걸음이 느려진다. 누가 재촉하지 않아도, 특별한 목적이 없어도 그렇다. 도시마다 걷는 속도가 다른 이유는 개인의 성격보다, 그 도시가 사람에게 요구하는 리듬과 태도에 더 가깝다.

도시는 시간을 어떻게 다루는가
걷는 속도는 시간 감각의 반영이다. 어떤 도시는 시간을 촘촘하게 쪼개 쓰도록 요구하고, 어떤 도시는 시간을 흘려보내는 데 관대하다. 전자의 도시에서는 걷는 행위 자체가 이동 수단이 된다. 빨리 도착해야 하고, 지체 없이 다음 장소로 넘어가야 한다. 걷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이미 도착 이후를 향해 있다.
이런 도시에서는 천천히 걷는 사람이 눈에 띈다. 흐름을 방해하는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속도를 맞춘다. 늦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 도시의 시간표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서다. 걷는 속도는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주변과의 합의에 가깝다.
반대로 시간이 느슨한 도시에서는 걷는 속도가 중요하지 않다. 빨리 걷는다고 해서 더 나아지는 게 없고, 늦게 도착한다고 크게 손해 보지도 않는다. 이곳에서 걷기는 이동이 아니라 체류에 가깝다. 길 위에 머무는 시간이 허용되기 때문에, 속도는 자연스럽게 내려간다.
공간의 밀도가 몸을 재촉한다
도시의 밀도는 사람의 걸음을 직접적으로 바꾼다. 인구가 많고 공간이 빽빽할수록, 길은 단순한 통로가 된다.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곳, 서 있으면 방해가 되는 장소. 이런 공간에서는 자연스럽게 걷는 속도가 빨라진다.
밀도가 높은 도시는 정지 상태를 허용하지 않는다. 멈추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와 부딪히고, 흐름이 끊긴다. 그래서 몸은 배운다. 멈추지 않는 법, 망설이지 않는 법, 목적 없이 서 있지 않는 법을. 이 학습의 결과가 빠른 걸음이다.
반면 여유 있는 공간에서는 걷는 속도가 기능을 잃는다. 넓은 인도, 한산한 거리, 사람보다 풍경이 많은 길에서는 굳이 서두를 이유가 없다. 이때 몸은 도시의 압박에서 잠시 풀린다. 보폭이 줄어들고, 시선이 올라가고, 걸음에 생각이 따라붙는다. 속도가 느려진다는 건, 공간이 사람을 밀어내지 않는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걷는 속도는 도시가 허용한 감정의 범위다
걷는 속도는 감정과도 연결돼 있다. 빠르게 걷는 도시에서는 감정을 오래 붙잡고 있기 어렵다. 슬퍼도, 기뻐도, 생각이 깊어져도 몸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감정은 이동 중에 처리되거나, 나중으로 미뤄진다.
그래서 빠른 도시에서는 무표정한 얼굴이 많아진다. 감정을 드러내면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느린 도시에서는 감정이 걸음에 묻어난다. 생각에 잠겨 걷고, 풍경을 보며 멈추고, 이유 없이 속도를 늦춘다. 이 도시들은 사람에게 감정을 따라 걷는 것을 허용한다.
결국 도시마다 다른 걷는 속도는, 그 도시가 사람에게 얼마나 느껴도 되는지를 정해놓은 결과다. 빨리 걷는 도시일수록 감정은 짧게, 효율적으로 소비된다. 느리게 걷는 도시일수록 감정은 길 위에서 머물 자리를 얻는다.
도시마다 걷는 속도가 다른 이유는 단순히 바쁨의 차이가 아니다. 시간의 밀도, 공간의 압박, 감정을 허용하는 범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도시의 규칙을 배우며, 어느새 몸으로 적응한다.
그래서 어떤 도시에 오래 살면, 다른 곳에 가서도 같은 속도로 걷게 된다. 몸이 먼저 도시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일부러 속도를 어겨보는 것도 필요하다. 빠른 도시에서 조금 느리게, 느린 도시에서 조금 더 오래 서서.
걷는 속도를 바꾸는 일은, 그 도시와 맺은 관계를 잠시 흔들어보는 일이다. 그리고 그 틈에서 우리는 비로소 묻게 된다.
이 속도가 정말 내 속도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