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마다 말수가 줄어드는 속도는 다릅니다. 같은 사람이 이사만 했을 뿐인데도 “요즘 말이 없네”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는, 성격이 변해서가 아니라 도시가 대화의 비용과 보상을 다르게 설계해두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도시는 처음부터 조용해지고, 어떤 도시는 서서히 말이 사라지며, 어떤 도시는 오히려 말이 ‘짧아지는’ 방향으로 진화합니다.

말이 빨리 사라지는 도시: 낯선 타인과의 ‘회전율’이 높은 곳
말수가 가장 빨리 줄어드는 도시는, 사람과 사람이 지나치게 자주 스쳐 지나가는 곳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인구가 많다는 사실이 아니라, 관계의 회전율이 높다는 점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사람을 내일 또 볼 가능성이 낮고, 단골 가게를 만들기보다 그때그때 리뷰 좋은 곳으로 이동하는 문화가 강할수록, 굳이 말을 붙일 이유가 줄어듭니다. 말이 줄어드는 속도는 곧 ‘다시 만날 확률’과 반비례합니다.
이런 도시는 대화가 관계가 아니라 기능으로 수렴합니다. “어디로 가요?” “결제 도와드릴까요?” “환승은 어디죠?”처럼 목적형 문장은 남지만, 안부형 문장은 빠집니다. 안부는 관계를 전제로 하지만, 기능은 관계 없이도 성립하니까요. 그래서 거리의 말수는 줄어들되, 안내 멘트와 주문 멘트만 남는 형태가 됩니다. 말이 사라졌다기보다, 대화의 종류가 바뀐 겁니다.
또 하나는 자극의 과밀입니다. 소음, 광고, 알림, 군중 속의 움직임이 많을수록 사람은 에너지를 ‘표현’보다 ‘방어’에 씁니다. 말은 생각보다 에너지 소모가 큰 행동입니다. 반응을 만들고, 상대의 반응을 읽고, 미묘한 오해를 정리해야 하니까요. 바쁜 도시는 그 에너지를 절약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사 초기에는 “말 좀 걸어볼까?” 하다가도, 한 달만 지나면 “굳이?”가 기본값이 됩니다. 말수가 빨리 줄어드는 도시는 대개, 친절이 없어서가 아니라 ‘불필요한 상호작용을 줄이는 게 효율’인 규칙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현상은 말이 줄어드는 대신 ‘표정도’ 같이 줄어든다는 점입니다. 말과 표정은 세트로 움직입니다. 말을 줄이면 표정도 줄고, 표정이 줄면 더 말을 붙이기 어려워집니다. 도시가 이 루프를 빠르게 돌리면, 사람은 짧은 시간 안에 “조용한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천천히 말이 줄어드는 도시: 관계는 남아 있는데 ‘여유’가 깎이는 곳
반대로 말수가 서서히 줄어드는 도시도 있습니다. 이 도시는 처음에는 생각보다 수다스럽습니다. 동네 단골이 생기고, 인사도 오가고, 관계도 제법 이어집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말이 줄어듭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관계가 사라져서가 아니라, 관계를 유지할 여유가 깎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도시에서 말수를 줄이는 가장 강력한 요인은 통근과 생활비입니다. 출퇴근이 길어지면 집에 돌아왔을 때 남는 에너지가 줄어듭니다. 생활비가 비싸면 하루의 많은 부분이 ‘관리’로 채워집니다. 월세, 대출, 보험, 저축, 이직, 부업, 자격증… 머릿속에 상시로 떠 있는 과제가 많아지면, 대화는 뇌의 우선순위에서 밀립니다. 말이 줄어드는 속도는 사실 ‘에너지 잔고’가 줄어드는 속도와 같습니다.
또 하나는 감정노동의 누적입니다. 직장에서 하루 종일 사람을 상대하는 도시일수록, 퇴근 후에는 말이 줄어듭니다. 이미 말로 돈을 벌었고, 말로 문제를 해결했고, 말로 분위기를 관리했기 때문입니다. 집에서까지 말을 이어가면 회복이 안 됩니다. 그래서 친한 관계일수록 오히려 말이 줄어들기도 합니다. 상대가 편할수록, 침묵이 허용되기 때문이죠. 이때 침묵은 사이가 나빠졌다는 신호라기보다 “우리는 굳이 말로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단계”라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말이 천천히 줄어드는 도시는, 겉으로는 따뜻하지만 안쪽에서 사람을 지치게 하는 구조를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도시의 조용함은 차가운 침묵이 아니라 피곤한 침묵입니다. “말이 없어진다”기보다 “말을 할 힘이 없어진다”에 가깝습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면, 도시의 분위기를 성격 탓으로 돌리지 않게 됩니다.
말이 줄어드는 대신 ‘짧아지는’ 도시: 대화가 압축되는 문화와 규칙
세 번째 유형은 말수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말이 ‘압축되는’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침묵의 도시가 아닙니다. 오히려 대화는 많습니다. 그런데 문장이 짧고, 속도가 빠르고, 맥락이 생략됩니다. 말이 많은데도 말수가 줄어든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대화가 관계를 두껍게 만들기보다 일을 처리하기 위해 최적화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도시는 보통 커뮤니케이션이 “속도 경쟁”에 들어가 있습니다. 회의는 짧게, 보고는 핵심만, 메신저는 단문으로, 결론부터. 여기서 말은 감정 전달이 아니라 의사결정 도구가 됩니다. 그러면 대화는 효율적으로 보이지만, 정서적 교류가 줄어듭니다. “오늘 어땠어?” 같은 질문이 “그거 됐어?”로 바뀌고, “요즘 좀 힘들어”가 “결론이 뭐야?”로 잘립니다. 말수가 아니라 말의 온도가 내려가는 겁니다.
또한 이런 도시에서는 ‘눈치 비용’이 큽니다. 말 한마디가 오해로 번지기 쉬운 환경(과도한 경쟁, 온라인 확산, 평가 문화)에서는 사람들은 불필요한 말을 줄이고, 안전한 말만 남깁니다. 안전한 말은 보통 짧습니다. 농담도 줄고, 사담도 줄고, 감상도 줄어듭니다. 대신 업무형 문장만 살아남습니다. 결과적으로 사람은 “점점 말이 없어졌다”는 평을 듣게 됩니다. 실제로는 말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위험한 말’을 안 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도시별 말수 감소를 볼 때는, 단순히 “그 도시는 차갑다/따뜻하다”로 나누기보다, 말의 형태를 봐야 합니다. 말이 완전히 사라지는지, 서서히 줄어드는지, 혹은 압축되는지. 이 세 가지는 원인도, 해결도 다릅니다.
빨리 조용해지는 도시에서는 반복 관계를 만들 수 있는 거점(단골, 동호회, 산책 코스)이 중요하고
서서히 조용해지는 도시에서는 회복 시간을 확보하는 생활 설계(통근, 약속 밀도 조절)가 중요하며
말이 압축되는 도시에서는 의도적으로 ‘정서 대화’를 넣는 습관(안부 질문, 감정 단어 사용)이 필요합니다.
도시가 말을 줄이는 방식은 결국 “대화가 이득인 상황을 얼마나 만들어 주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말은 사회적 행동이고, 사회적 행동은 비용과 보상에 민감합니다. 도시가 비용을 높이면 말은 줄고, 보상을 높이면 말은 늘어납니다. 그러니 말수가 줄어든 자신을 탓하기 전에, 내가 어떤 도시에 어떤 규칙으로 노출되고 있는지부터 보는 게 더 정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