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는 인사가 먼저였다.
아는 얼굴을 보면 자연스럽게 고개가 숙여졌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짧은 한마디가 공기를 채웠다. 인사는 관계의 시작이자 확인이었다. 그런데 도시에서 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인사가 사라진다. 모르는 사람에게뿐 아니라, 분명 몇 번은 마주쳤던 얼굴에게도.
도시가 특별히 인사를 금지한 적은 없다.
표지판도 없고 규칙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점점 인사를 생략한다. 이 글은 그 생략이 시작되는 지점들—도시에서 인사를 하지 않게 되는 순간들에 대한 기록이다.

서로를 ‘모른 척’하는 것이 예의가 되는 순간
아파트 복도에서 이웃과 마주친다.
분명 얼굴은 익숙하다. 같은 층에 살고,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은 눈이 마주쳤다. 예전 같았으면 가볍게 “안녕하세요”가 나왔을 순간. 하지만 도시에서는 그 말이 입술까지 오르다 멈춘다.
왜일까.
도시의 공용 공간은 사적인 침묵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인사를 건네는 순간, 상대의 시간을 조금 요구하게 된다. 답해야 하고, 표정을 만들어야 하며, 관계의 경계를 다시 그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부담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도시에서는 ‘모른 척’이 배려가 된다.
서로의 하루를 방해하지 않는 선택. 인사를 하지 않음으로써 “당신에게 말을 걸지 않겠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 무언의 합의는 편안하다. 하지만 그 편안함은 관계의 가능성까지 함께 닫아버린다.
도시는 이렇게 가르친다.
아는 척하지 않는 것이 성숙함이라고.
그 결과, 우리는 인사를 예의로 배우기보다 생략을 기술로 익힌다.
속도가 감정을 앞지를 때, 인사는 ‘지연 요소’가 된다
도시는 빠르다.
출근길의 보폭, 횡단보도의 초,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속도. 이 리듬 안에서 인사는 잠깐의 멈춤을 요구한다.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 한마디를 건네는 일. 짧지만 분명한 지연이다.
속도가 중요한 공간에서, 감정 표현은 종종 비효율로 취급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선을 낮춘다. 휴대폰 화면으로 눈을 옮기고, 이어폰을 꽂는다. 인사를 하지 않기 위한 장치들이다. 그렇게 하면 멈출 이유가 사라진다.
특히 출퇴근 시간대에는 이 경향이 뚜렷해진다.
같은 얼굴을 매일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인사를 나누는 순간, 우리는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타인이 아니라 잠시 연결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도시는 그 연결을 최소화하라고 요구한다.
이때 인사는 예의가 아니라 선택이 된다.
그리고 선택은 대개 생략 쪽으로 기운다.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감정 소모를 줄이기 위해서. 그렇게 인사는 점점 특별한 상황에서만 허용되는 행위가 된다.
인사를 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에 익숙해지는 순간
가장 미묘한 변화는 이 지점에서 일어난다.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 불편하지 않게 되는 순간. 오히려 인사를 해야 할 상황이 어색하게 느껴질 때. 우리는 어느새 인사 없는 관계에 완전히 적응한다.
도시의 관계는 기능 중심이다.
같은 공간을 쓰지만, 목적은 다르다. 엘리베이터에서는 목적지만 공유하고, 카페에서는 테이블만 공유한다. 이 관계에서는 인사가 필요하지 않다. 필요 없는 것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하지만 이 편리함에는 대가가 있다.
인사를 통해 확인하던 ‘나 여기 있어요’, ‘당신을 인식하고 있어요’라는 신호가 줄어든다. 그 신호가 사라지면, 우리는 더 쉽게 배경이 된다. 서로의 하루에서 스쳐 지나가는 요소.
그래서 가끔, 아주 사소한 인사가 크게 느껴진다.
골목의 작은 가게에서 건네는 한마디,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 먼저 고개를 숙이는 순간. 그 짧은 교환은 도시의 소음을 잠시 멈추게 한다. 인사가 이렇게 강력한 이유는, 희귀해졌기 때문이다.
인사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
도시에서 인사를 하지 않게 되는 순간들은 대부분 합리적이다.
배려이고, 효율이며, 자기 보호다. 문제는 그 합리성이 쌓일 때다. 인사를 생략하는 선택이 반복되면, 관계의 문턱 자체가 높아진다. 말을 걸기까지 더 큰 용기가 필요해진다.
도시는 여전히 묻지 않는다.
“왜 인사하지 않나요?”
대신 이렇게 속삭인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잖아요.”
그 속삭임에 오래 귀를 기울이다 보면, 우리는 편해진다.
하지만 가끔은 불현듯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누군가와 눈을 맞추고 인사한 게 언제였지?
인사는 거창한 친밀함이 아니다.
잠깐의 인정, 짧은 연결, 하루의 표면을 스치는 온기다. 도시에서 인사를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관계를 크게 바꾸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사람을 사람으로 남겨두겠다는 선택에 가깝다.
오늘 하루, 엘리베이터에서든 골목에서든,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다면
그때의 인사는 어쩌면 도시가 잠시 허락한 느린 순간일지도 모른다.